1.
우리 사회의 반성폭력 담론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계 가족 보호라는 남성 공동체의 이해에 더 기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96년 대법원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남성 3명이 길거리에서 승용차로 납치하여 집단 강간한 사건에 대해, "피해자를 여성이라고 볼 수 없고, 생식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제 1심과 제2심 판결에 이어 무죄를 판결했다. 이 사건은 성폭력의 정의뿐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시각에 부합하는 '진짜' 여성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중략)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 간 성폭력, 성 전환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중략)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 - '사유재산권' 침해 - 가 된다.

2.
그렇다면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바친 인생만큼 우리 사회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존중하는가. 우리 기억 속의 아릿한 상처와 안쓰러움으로 남아 있는 헌신과 희생을 다한 어머니와, 음식점에서 떼를 지어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지하철에서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뻔뻔스러운 여성들, 오형근의 사진 작품에 나오는 촌스럽게 화장한 얼굴, 문신한 눈썹, 뚱뚱하고 나이 든 추레한 여성,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물건 값을 깎아대며 시장에서 악다구니를 써대는 여성들은 우리들 각자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인가? (중략) '탈특권화된' 아줌마와 '특권화된' 어머니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며 집에만 머무를 때,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을 드러내며 집 밖으로 나올 때, 남의 어머니일 때 그녀는 아줌마다. 그녀가 집에서 내게 밥을 해줄 때는 어머니지만, 그녀 자신이 음식점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아줌마다. 여성은 평생토록 서비스를 하는 주체이지 받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3.
남성들이 일상적인 군 복무든 전쟁터에서든, 군대 안의 노동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여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후방에 있는' 여성의 후원과 인정, 감사의 치사가 없다면, 이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남성 지배 세력은 피지배 세력 남성을 동원할 수 없고 전쟁도, 군대도 제도로 기능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베트남 참전 한국인 병사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이유는, "알 포인트 작전에 지원하면 쭉 빠진 스튜어디스들이 주스를 따라주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 "이번 훈련만 끝나면...... 정숙아, 기다려라.", "서울 가면 바니걸스하고 뽀뽀하게 해줄게.", "귀국하면 딸내미와 창경원에 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처럼 상상이든 실제든, 여성을 매개하지 않는 군사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남성은 국가와 직접 연결되거나 국가 그 자체이지만, 여성은 남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가에 닿을 수 있다. 때문에 '남자가 없는 여자들' - 레즈비언, 비혼 여성, 이혼 여성 등 - 혹은 남성에게 선택받기 어려운 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시민권을 갖기 어렵다.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남성에게 밥을 해 주거나 섹스 상대가 됨으로써, 즉, 성역할 노동을 통해 국민인 남성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남성 국가의 인정에 의해 '국민'이 된다. (중략) 한국 사회에서 젊은 남성이 군대에 가면, 또래 여성은 애인으로서 성역할을 강하게 요구받는데, 이는 개인 차원의 연애를 넘어 탈영과 같은 일탈을 방지하는 일종의 간접적인 국방 행위로 인식된다. 이른바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격렬한 비난은 이 같은 인식과 관련이 있다. 애인을 군대에 보낸 여성과 연애하는 남성은, 남성 연대를 깬 남성으로 간주되고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군기지 주변의 성매매나 '군 위안부' 제도가 남성들의 군대 내 긴장과 폭력을 '완화'하는 것처럼, '사회에 있는 애인'이 하는 역할도 이와 비슷하다.

-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교양인
Reference
신체적으론 여자지만 법적으론 남자다
성폭력을 통해 본 여성의 시민권
2008/04/13 23:56 2008/04/1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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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국가의 힘은 국가의 이론 이전의 마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국가는 아직 완전히 탈신비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왕권신수설의 시대에는 국가(국왕)는 신의 대리로서 질서를 확립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국가에서는 성스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정치사상에 의해서 국가는 세속화되었습니다. 국가는 국민주권에 근거한 공리주의적인 사회계약으로 된 조직이며, 신비적인 요소는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국가에는 폭력행위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국가의 마법이라고 부르고 싶은 힘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은 마술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요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녹색평론사
그들이 말하는 미메시스란 철저하게 '객체에의 동화'를 의미한다. 한없이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 나아가 자연의 일부로서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객체화하고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계몽된 인간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을 '이성'이라고 생각함으로써 "현실의 흐름에 비해 영혼의 흐름을 과대평가"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유와 현실의 격렬한 분리' 속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더이상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생겨났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스스로가 지배하기 시작한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이것이 자신을 지배하기 시작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복수이다.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변한다. '고독한 단독자'인 '나'가 조화로운 세계의 탯줄을 끊고 태어난다. 나의 탄생은 나 아닌, 하지만 '나'의 존재를 증명시켜 줄 수 있는 '타자'를 필요로 하고, 이때 세계는 혹은 내가 그것의 일부였던 자연은 주체인 나와 대결하는 대상(객체)으로 전락한다. 내가 그것과 조화로운 하나였을 때, 그 의미를 물을 필요조차 없었던 세계의 의미, 현실의 의미, 존재의 의미 등등이 의문투성이가 되고, 세계는 점점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되어간다. 알 수 없는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그 세상과 대결하여 나와 세계의 간극 사이를 방황하는 영혼의 이름이 루카치가 말한 '문제적 개인'이다. -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권용선, 그린비
2007/08/11 06:36 2007/08/11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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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음모와 비방의 귀재였을 뿐만 아니라, 학술논문을 저술할 때에도 사실에 전혀 입각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한 증거는 거의 모든 사례보고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눈에 띄눈 한 가지 예로 유명한 '쥐인간' 에른스트 란쳐를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장교였던 란처는 쥐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프로이트는 한 정신분석학회에서 자신이 11개월 동안 란처를 분석하고 치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 란처는 불과 몇 주 동안 치료를 받다가 중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짧은 기간 사이에 깜짝 놀랄 만한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즉 란처가 그의 여자친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의 항문성교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가졌으며, 이러한 억압된 욕망이 쥐에 대한 강박적 공포를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꼬마 한스'의 주인공인 소년 한스를 실제로는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었다. 이 소년은 말 공포증에 시달렸는데, 마차사고를 직접 목격한 이후부터 말에 대한 공포증이 생겼다고 본인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으로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소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이러한 분석은 프로이트 이론의 맹신자이자 자신의 아들을 상대로 직접 정신분석을 했던 소년의 아버지의 분석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헤르베르트 그라프라는 실제이름을 지녔던 '꼬마 한스'는 프로이트의 대화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소년은 집으로 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프로이트 교수님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나요? 어떻게 그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을 수 있죠?"
- 과학의 사기꾼, 하인리히 창클, 시아출판사
2007/08/02 20:41 2007/08/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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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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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삶에서 철학이 필요하단 걸 느끼고 있다. 집에 있는 철학책을 조금 뒤져봤는데, 쇼펜하우어책만 달랑 있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이 사람 책은 정말 정말로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밖에 없다니 (절규). 읽으면서 느낀 건데, 그 독단적인 말투를 빼면 여러모로 맘에 드는 말이 많긴 하지만 (ex. 생은 고통과 나태를 왕복하는 추일 뿐이다), 역시나 이 책은 집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나중에 서점에 가면 니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구해서 보고 싶다.

그... 미학오디세이 3권을 봤다. 나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나는 그림이 1) 아름다움의 추구와 2) 인간 내면의 무의식 표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현대 미술을 그러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마치 책을 껍데기 디자인이 이뻐서 맘에 든다고 하는 수준 정도밖에 안 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음악은 왜 아직도 중세 시대의 역할 - 감정 표현과 상황 전달 - 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고.

사랑니를 뽑았다. 얼굴이 우스꽝스레 부풀어 올랐다. 사람 만나기가 싫다.
2007/07/14 09:54 2007/07/1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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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논리적인, 실은 논리적으로 보이는, 논쟁들은 그 근거들의 논리적 타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다. 혈액형-성격 연관론을 믿는 사람들을 비판하려 했던 이유는 그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유연히 사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열등감과 질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위의 종교 논쟁을 보고 잠깐이라도 진화론이 합당하다는 근거와 창조론이 합당하지 않다는 근거를 대려고 고민하였던 이유는 내가 기독교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못마땅함은, 그들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성향에 기인한다고 내 스스로에게 합리화 시키고 있었지만, 실은 심적 안정과 행복을 (그들은 얻었는데) 나는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나의 열등감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화론이 옳은지 창조론이 옳은지 학문적으로 개뿔도 흥미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진화론은 감정적인 논쟁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에 "매우"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자주 인용되곤 한다. 멜서스의 인구론과 수많은 그 변형들은 실은 굶어죽는 빈민층들을 감싸기 귀찮아하는 상류층의 논리적 도구일 뿐이다. 뇌용량-지능 연관 학설은 여성과 흑인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진화의 가장 우수한 마지막 단계라고 오해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아메바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결론 짓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동성애가 유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은연중에 (자연소멸 법칙에 따라) 동성애가 '열등'한 형질이라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도 실은 동성애를 혐오하는 작자들의 헛소리일 뿐이다. 당신은 대머리가 사막에서 사망할 확률이 대머리가 아닌 사람들의 사막에서의 사망률보다 10% 높다고 해서 대머리 형질을 가진 사람을 지구상에서 쓸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진화론이 일반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콘돔 사용법이나, 카드깡 사기 방지하는 법, 신용카드 관리하는 법들보다 결코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잘못 틀어박힌 진화론은 (당사자가 자신이 수많은 억지 주장에 쥐여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삶을 속박할 수 있기 때문에 교과 과정에서 이것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화학 시간에 굳이 폭탄 제조법을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만일 생물학자들이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며 만인들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교양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진화론이 얼마나 위험한 속박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는지를 학생들에게 거듭 각인시켜 준 후에야 그것을 가르치기를 희망한다. 사실, 조금 더 억지를 써서, 이러한 교육이 진화론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 이론 전반에 대하여 실시되기를 바란다. 나는 상대성 이론을 들먹이며 문화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든.

마지막으로, 이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던 작품 / 장소들을 언급하고 싶다 : * 후회하지않아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생명의 춤 * 문화를 넘어서 (에드워드 홀의 책들을 알려주신 황용하 선배께 감사를 드린다) * 인간에 대한 오해 * 작은 인간 * 천년바위

2007/06/21 09:18 2007/06/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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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말대로야." 눈을 뜨고 토오루를 보며,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 나는 그런 일에 어색함조차 들지 않았지만." 라고 말했다. 토오루는 시후미가 무엇에 그렇게 감격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소설은 마지막이 늘 불만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말야, 난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의 연인이 무척 마음에 들어."
2007/04/14 19:48 2007/04/1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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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타워를 끝냈다. 일본 책은 언제나 담담한 문체인 것 같다. 살인을 해도 담담하고, 사랑을 해도 담담하고. 나도 역시 일상에서 그렇게나 담담하게 독백할 수 있을까. 작가는 일상을 그렇게 담담하게 향유해 나가는 것인가. 왜 무언가에 즐거워 하고 무언가에 슬퍼하는 걸까. 준우 형 말대로 반백년도 더 될 생애에 아무리 놀라운 일도 한 번 쯤은 스쳐갈 수 있을 만한 일인데.

요즘들어 세상과, 삶과 멀어지고 있다. 붕 뜬 느낌. 왜 나는 인간사 몇 천년 동안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오지 않은, 어떻게 보이면 시간낭비인, 질문들에 대하여 골치를 썩이면서 시간을 보내는 걸까.

대학원 정하는 게 이제 귀찮다. 사실 어디를 가던 나 하기에 달렸다. 버클리 가면 될 것이 UW 가서 안 될 것도 없고, 또 그 반대도 아니고. 뭔 말 하면 사람들이 그래도 버클리 아깝다고 말 하는게 이해는 가지만 그것도 귀찮고. 솔직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귀찮다 - 이번 한 달 동안 정말 징하게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닥 이제 도움... 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사실 아닌가. 어딜 가나 critical한 결정 요소가 없다면, 어디를 가도 못 한 선택은 아닐 것이니.

컴퓨터다. 우선 컴퓨터부터 꺼 놓고 생각하자. 내가 진정 세상과 삶에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 컴퓨터 중독에 의한 무기력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지 구분은 할 수 있겠지.

2007/04/08 09:16 2007/04/0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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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야,
운동을 시작한지 나흘 째 되고 있다. 대학원들을 돌아다니면서 다시 운동을 하지 않게 되긴 하겠지만, 시작한 거, 열심히 해 봐야지. 운동을 하면서 Jared Diamond의 Collapse란 책을 읽고 있다. 그래도 두껍지만 내용은 딱딱하지 않아서 이렇게 운동하면서 심심풀이용으로 읽기엔 좋은 책이지. 거의 다 읽어가고 있어. 조만간 심심풀이용 한국 책들을 조금 더 주문해야 할 것 같다. 곧 이사할 때 짐이 될 걸 알지만, 하지만, 이렇게 책 읽을 여유 있을 때가 또 어디 있겠니.

이 책은 환경 문제를 정말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 먹이사슬, 토양의 염화 문제, 침식 문제 같은 것을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피상적으로 배워서 환경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고 살았는데, 이 책의 한 쳅터만 읽어도 환경 문제가 정말 한 나라의, 아니 전 인류의 문제인 것을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고대의 찬란했던 마야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멸망한 이유가 무자비한 삼림의 벌채와 농경으로 인한 토양의 염화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니? 황무지인 그린란드가 사실은 말 그대로 푸르른 대지였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니? 이스터 섬이 울창한 수목으로 덮여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사막화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니? 자연 교과서에 이러한 책 내용의 일부를 실으면 많은 국민들의 환경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요즘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고 있다. 운전이라던지, 환경 문제라던지, 성 교육이라던지, 신용 관리법에 대한 것이라던지, 법에 관한 것이라던지, 구급 처치에 관한 것이라던지. 하다못해 술 먹을 때 약이랑 같이 먹으면 골로 간다는 것 정도도 학교 교과과정에서는 왜 없는 것일까. AIDS, 간염, 폐렴과 같은 주위에서 접하기 어렵지 않은 질병에 대해서 우리는 왜 기본적인 지식도 갖지 못하는 걸까.

서론이 본론보다 길어져 버린 것 같다. 요즘 들어서 나의 비관론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나는 세상이 비관적이라고 되뇌이면서 세상이 악으로 가득차 있다고 기정사실화 하고, 또 나도 그 우울한 세상의 일원의 하나인 것을 필연이라고 세뇌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내 자신이 타락하는 것을 방관할 이유를 만들 수 있었겠지.

어쩌면 말야, BlueBrown이란 내 자의식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어. 어둠과 몽환에 섞인 청색과 고동색보다는 조금 다 밝고 힘찬 색을 바라고 싶다. 청록과 관련된 게 좋은 것 같아. 빛의 삼원색으로 청록이면 티없이 맑은 하늘 빛이 되고, 물감의 삼원색으로 청록이면 푸르른 바다 빛이 되잖니. 조금 더 그럴듯한 이름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아니면, 푸른 북소리 청고동, 혹은 청고둥. 둘 다 여전히 맘에 드는 이름이야.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이 만화 '산낙지를 먹는 아이'의 영향이 크다. 조승연이 퍼 온 글인데, 원출처는 DC 카툰-연재 갤러리 '겸디갹'님이라고 하는구나. 사실 이 만화를 보고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살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말야. 내 블로그에 들릴 친구들도 이 만화를 보고 감명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하나 없이 산다는 게 힘들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하루 동안이라도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게 정말 힘든 것 같다. 좋은 하루 되렴.

성재

2007/03/08 00:37 2007/03/0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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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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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귀염둥이 2007/03/10 23:02 # M/D Reply Permalink

    오늘은 많이 못자겠지만, 가서는 잠도 푹 잘자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따뜻한 캘리 날씨도 즐기고, 맛난것도 많이 먹고 오세요 - 새로운 시작,, 을 위한 떠남이니까, 많은 생각들과 함께하는 뜻깊은 여행이길 바래요. 나는 열심히 경제 공부하고 있을게 + _ + 가끔 그 노래들도 들어줘. 사랑해 ♥ i am always on your si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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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sink)라는 말은 오물이나 폐기물을 받는 그릇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쓴 것이다. 캘로운은 로크빌 헛간에서 대다수의 쥐들에게 나타난 총체적인 행동의 왜국을 지칭하기 위해 '행동의 싱크'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그러한 현상은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동물을 한군데 몰아넣는 모든 행위에서 발생하는 결과로서 이 용어가 풍기는 건강치 못한 함의는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행동의 싱크는 집단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병리적 형태를 악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강력한 쥐 두 마리가 첫번째와 네번째 우리에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고 각기 8~10마리의 암놈을 거느린 후궁을 둠으로써 4분의 1에이커 우리에서 관찰한 바 있는 자연스러운 집단 형성을 균형 있게 유지하였다. 나머지 14마리의 수놈들은 두분째와 세번째 우리로 나뉘어 들어갔다.
싱크가 발견되었을 때 (구애와 교미의 양상에 관해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는데 수놈에게 나타난 그러한 변화들의 몇 가지 유형이 확인되었다.
  1. 세 마리 정도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수놈들은 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
  2. 수동적인 수놈들은 싸움도 교미도 회피했다.
  3. 종속적이고 과잉활동적인 수놈들은 암놈 꽁무니를 쫓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한 암놈을 동시에 서너 마리가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다. 쫓는 동안에도 암놈이 '굴'로 피신하면 입구에서 기다리며 쉴 틈을 주는 대신 굴 안으로 쫓아들어가 호의적인 관계를 지키지 못했다. 교미 중에도 2, 3초 정도만 암놈의 목덜미를 무는 것이 정상인 데 반해 수분씩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4. 범성적(凡性的) 경향의 수놈들은 아무 쥐하고나, 즉 발정기건 아니건, 암놈이건 수놈이건, 어리건 늙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교미하려고 했다.
  5. 어떤 놈들은 사회적, 성적 교류를 끊고 주로 다른 쥐들이 잠든 사이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인간들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전쟁사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2007/02/08 13:39 2007/02/0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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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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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와 우리 식구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돈이 많고 그들이 자신이 속물들임을 위장하기 위해 흔히 쓰는, 내게 돈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하는 표정으로 문화예술가를 자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실은 뼛속까지 외롭고 스스로 홀로 앉은 밤이면 가여운 것이 사실인데도, 그것을 위장할 기회와 도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실은 스스로가 외롭고 가엾고 고립된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늘 박탈당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생과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를 늘 잃고 있는 셈이었다.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중략)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2007/01/27 13:57 2007/01/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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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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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은 침묵 속에서 꾸뻬에게 태고적부터 있어 온 한 가지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욕망이나 추구마저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과 하나가 되어 존재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근원적인 행복감이었다. 이 근원적인 행복은 자주 찾아오지 않지만,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으며, 세상에서 얻는 다른 모든 행복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었다. 꾸빼는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노승의 웃음이 바로 그 근원적인 행복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느꼈다.
만일 당신이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놓칠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지는 겁니다. (중략)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행복을 찾아 늘 과거나 미래로 달려가지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겁니다.
-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오유란 역, 오래된미래
2007/01/21 00:52 2007/01/2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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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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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 들 중 대부분은 힌 광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독자들이 미친놈의 헛소리라 콧방귀 뀌며 넘기기에는 그들의 지식은 너무나 방대하고, 주장은 흠잡을 곳 없이 논리적이다. 그들은 논리로 무장한 자신의 성벽 속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의에 의한 타살(살인자의 건강법, 머큐리) 또는 살인(오후 4시, 적의 화장법)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광인들의 완벽한 궤변에 매료되어 그들의 사상에 매료되고 있던 독자들은 이러한 파국적인 결말에 충격을 받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비참한 종말을 희락에 가득찬 몸짓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리고 독자는 거울을 통해 보게 된다.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현실이라는 성벽에 둘러싸인 채 행복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미친놈들의 궤변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의 장벽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마저도 책의 결말과 같이 외계인에게는 최악의 상황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충격 요법'은 자전적 소설인 그의 처녀작 '두려움과 떨림'에서 직선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일본이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하지만 일본인들이 그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자기합리화 시키는지 통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5/09/03 11:44 2005/09/0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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