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세상은 투명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걷고 있다.

길의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진다. 허나 투명하다.
대리석같이 매끈하고 단단하지만, 폭신하고 부드럽다.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다.
아무 감각이 없고, 모든 감각이 어루어진다.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보트를 걸어다는 것 같이, 약간은 출렁거린다.
길은 투명하고 환하며 어둡다. 깊다. 발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걸어도,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꿈길이라고 하던가.

소년은, 걷고 있다.
걷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도 없고,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저 어떤 세상의 사람들처럼,
시계만을 바라보며 뜀박질 하듯 걸을 필요도,
고된 하루에 지쳐 비틀비틀 걸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뿐사뿐. 전혀 힘이들지 않게. 느릿느릿. 조용히. 사박.

숲이다. 소년이 걷고 있는 곳은.
숲에, 나무, 소년은 이것이 나무라고 알고 있지는 않지만, 나무는,
굉장히 높이, 솟아있다.
굵은 밑둥은 소년이 가득 부둥켜 안아도 반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나무는 고동색이다. 그건, 저 어떤 세상의, 탁한, 잡색이 다 섞인 탁색이 아닌,
어찌 말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투명한 색. 소년은, 색이란 것을 모르지만.
그리고, 육중하게, 저 이끼 살짝 낀 폭신한 푸른 흙을 감아내리는 뿌리.
사실, 길이 나 있지 않지만, 숲은 소년이 걸어다니기에 전혀 힘들지 않다.
약간의 풀숲과, 큼직큼직히 박혀있는 고동의 나무.

숲의, 약간은 습한, 축축한 이끼의 향취가,
그렇지만, 들여마시면 저 깊은 가슴 속까지 시원히 간질여줄 싱그러움이,
이름 모를 꽃의 노래가 여기저기 박혀있는 향기가,
콧구멍으로 와락 스며든다.
소년의 코는, 아랫 부분이 약간 뾰족하고, 튀어나와 있다.

잠시 멈춘 소년은, 위를 올려다 본다.
저 높고 높은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시린 하늘과 달이 보인다.
소년은 달을 달이라 부르는지 알지 못한다.
달은, 노란색, 은색, 보라색, 녹색, 파랑색, 발간색이 모두 섞여서,
아니, 이 모든 색을 섞으면 탁해지는 저 세상과는 달리,
깊은 투명함, 날카로이 아니한 부드러움을, 시원함을 보금은 동그라함을 담고 있다.
달도 하늘도 이파리도 투명하다.

왜 멈추었는지, 왜 걷는지 소년은 알지 못한다.
행위를 모르고 행한다.
걷기에 걷는 것이고, 멈추기에 멈추는 것이다.
길은 없다.

사박, 다시 걷는다. 천천히. 무엇에 홀린 듯. 천천히. 허나 방향 없이.
발이 가는 데로. 탁한 세상의 언어를 빌리자면.
시간이 흐름을 알지 못하나 흐름을 흐름으로 온전히 흘려보낸다.
소년은 두렵지 아니하다. 세상은 자신이며, 자신이 세상이기에.
죽음을 모르고, 배고픔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알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 향기를 품은 바람이 분다.
소년은 그것을 바람이라 칭함을 모르지만, 시원한 흐름을 느낀다.
온몸으로. 싱그러움. 상큼함. 시원함. 안온함. 푸근함. 그 모든 것.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소리가, 마치, 언젠가 하루종일 앉아서 바라보았던,
투명한 해변가의, 잔잔한 파도소리처럼, 사아아아, 흘러퍼진다.
저 멀리에는, 이름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커지다 사그라든다.
걷고 있기에.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신기하단 듯이 바라본다.
희게 빛나는 아카시아꽃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기도 하고,
이끼 위 수줍이 고개 내민 은초롱꽃 곁에 쭈그려 앉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멍하니 바라보는, 그 백옥처럼 흰, 하지만, 저 세상의 흰색과는 다르이, 투명한,
투명한 꽃을 하나 하나 바라보던 소년의 눈에는, 큰 눈에는,
저 세상의 어른이라는 종족의 것처럼,
누렇게 뜬 흰자엔 더러운 핏줄이 서고,
눈동자의 경계는 흐리멍덩하고,
탁한 검은자가 들어찬 눈이 아닌,
그야말로, 풍덩, 온 세상을 빠져들게 할 깊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의 눈가엔,
투명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다, 턱에 매달린다.
흐르던 바람이 소년의 뺨을 어루만지자, 소년은, 뺨이 차가움을 느낀다.
무엇때문에 울었는지, 슬픈 것인지, 행복한 것인지, 왜 뺨이 차가운지,
모른다. 알려 하지도 않는다.
단지, 우는 것으로 울기에 울었을 뿐.

달린다.
투명한 달이 시원히 걸린 하늘을 가른 푸른 그림자는 정신없이 흘러내린다.
저 멀리 부엉이 우는 소리도 순식간에 스며들어간다.

얼마나 달렸을까.
소년은 지금 커다랗고 투명하고 맑고 깊은 호수를 바라본다.
투명한 하늘의 별들과, 여기저기 춤추는 반딧불의 안온한 빛이,
호수에 내린다. 호수는, 마치 빛을 흘림마치 소소히 빛을 스며내린다.
맹꽁이와 개구리가 와글와글 울어대는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소년은, 진한 초록이 묻어나는 보송보송한 이끼가 덮인 돌 위에 누워 본다.
그리고, 보드란 이끼 위에서, 마음껏 몸을 움직인다. 기지개도 펴 본다.

웃는다. 저 어떤 세상의,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도 아니고,
추악한 감정의 산물도 아니고, 억지로 밝아지려는 노력도 아닌,
단지, 순수한, 웃음의 웃음.
빠알간, 새빨간 입술.

소년은, 투명한 목소리로 잠시 콧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곧 사그라든다.
이 빛의 한 가운데 누워,
마치 장엄한 우주의 운행 한 가운데 흐름마치 엄숙함을 나타내본다.

별은 동그란 제 길을 걸어 운행하고, 반딧불은 제멋대로 비행한다.
세상은, 조용히 깊어간다. 어두워진다.
소년은 그것이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른다.
머얼리 와글거리는 울음소리가 사그라든다.
나뭇잎은 점점 멀리서 잎을 부빈다.
바람은 더욱 조용히 소년을 휘감는다.
안온함이 파도 마냥 밀려들어온다.
2003/06/14 22:54 2003/06/14 22:54
Date
2003/06/14 22:54
Category
phantasmag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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